Skip to content

the-death-of-ivan-ilyitch

이반 일리치의 죽음

사회적 성공과 격식의 그림자

집무실에 모인 이 신사들이 이반 일니치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판사들 당사자나 지인들의 인사 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였다.

이 죽음으로 각자의 머리속에는 직장 내 인사이동과 가능할 법한 변화에 관한 생각만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보기에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죽어 간다는 이 무섭고 끔찍한 사건을 어쩌다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일정 부분 점잖지 못한 일의 수준으로 ( 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거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대하듯 ) 격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한평생 모셔온 ‘품위’ 라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식을 접한 동료들의 태도는 그를 애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승진과 인사 이동에 대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의 무관심한 태도는 단순히 비난받을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격식"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되는지를 드러낸다. 이반 일리치가 추구했던 "격식"은 결국 그의 죽음을 불미스러운 사건 정도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 점에서 나는 "격식"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 동안 사회적 성공과 "격식" 있는 삶의 양식을 추구하며, 이를 이루어냈다. 그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안정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고독한 순간을 맞이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격식"이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가 결국 자신을 배신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나 또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관계를 지향하며, 주고받은 만큼만 관계를 맺으려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이런 내 모습이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격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고독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모순이 나를 더 깊은 생각으로 빠지게 했다.

나약함에 대한 서글픔

이러한 거짓 말고도, 혹은 그 때문에 더욱 이반 일리치를 괴롭힌 것은 아무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불쌍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나긴 고통을 맛본 뒤에 이반 일리치는 때때로 이렇게 고백하기 창피스럽지만,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 주기를 무엇보다 바랐다. 아이를 어루만지고 달래 주듯 상냥이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자신을 위해 울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제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처지와 끔찍한 고통과, 사람들과 하느님의 잔혹함과, 하느님의 부재에 목놓아 울었다.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결국 아이처럼 울며 위로받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아이를 달래듯 그를 쓰다듬고 위로해 주기를 바랐다. 그 장면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누구나 고독과 나약함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 서글펐다.

타인의 말과 행동의 힘

A: 내가 그렇게 힘들게 올라갔는데, 씨 ... 야 우리나라 총 어디서 파냐 이게 뺨 석대로는 분이 안풀려, 총을 그냥 세 방 쏴버려야지, 진짜 경기 도민이 서울에 나가는게 어떤지 알아 ? 근데 그런 놈을 소개시켜줘 ? 내가 한 번 갔다온 건 암말 안해 ... 야 근데 애 딸린 홀애미가 말이 되냐 ? 세상에 자기 자식보다 끔찍한게 어디있냐 근데 난 걔가 하나도 안 소중해 남의 자식이 뭐 ? 여기서 부터 얼마나 큰게 어긋나는 거냐고

B: 제가 비록 이혼했지만, 제 인생에서 제일 잘 한게 결혼이에요. 어디가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겠어요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의 태도가 스스로를 고독에 빠뜨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그가 추구했던 '품위'와 '격식'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그의 고독을 심화시켰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최근 본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A는 자신의 소개팅에 대해 불평하며 "경기도민이 서울로 나가는 게 어떤 건지 알아? 그런데 그런 놈을 소개시켜줘?"라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 불만은 그의 삶의 고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그 대사는 의도치 않게 B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B는 이혼 후에도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A의 말은 그에게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단순히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타인에게 고독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었다. A의 무심코 뱉은 말은 B를 고립시키는 상처가 되었고, 이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예상치 못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무심한 말 한마디가 상대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부정하거나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힘과 그 책임감을 다시금 일깨운다.

결국,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태도로 인해 고독에 빠졌듯이, 우리 또한 타인의 삶에 고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격식이나 가치관이 때로는 우리를 더 고립시키고, 타인을 상처 입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고독의 여운

이반 일리치와 드라마 속 장면들은 내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무심한 태도가 만들어내는 고독과 그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추구했던 태도들이 결국 나 자신을 더 고립시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고독과 나약함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 여운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고, 삶에서 스스로를 더 이해하고 싶게 만들었다.